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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 뭐예요? 저도 형 사랑해용~”
류건우가 이세진 말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게 아니라. 이세진, 너랑 연애하고 싶다는 뜻이야.”
“넹?... 형, 그... 게이에요?”
“어...”
“앗, 음, 어... 죄송해요... 형 물론 좋은 사람이지만~ 그...으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장담컨대 지금이 류건우랑 이세진이 한 대화 중 가장 분위기 나가리 된 순간이다...
동경일까요? _written by 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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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류건우, 이세진이랑 싸웠냐?”
“뭔 소리야.”
“야, 그런 거 아니면 좀 잘해줘라. 걔가 너 얼마나 좋아하냐~”
“신경 꺼라.”
류건우가 생글생글 웃는 놈 손에서 노트 뺏어들고 자리를 떴다. 수업 시간에 처자고 전교 1등 노트 볼 수 있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며 싹싹 비는 놈한테 노트 좀 빌려주는 친절한 짓 좀 해 줬다고 우리가 친한 줄 아냐. 내가 적잖이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지. 오지랖이 심하다. 예민한 류건우 뒤통수에 우리 세진이 불쌍해서 그런다! 하는 소리가 박혔다. 이세진이 왜 느그 세진이냐. 속으로 궁시렁대던 류건우가 노트 들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다가 멈춰 서서 다시 뒤돌아 내려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습관이 문제였다. 이세진 교실을 하도 들락거렸더니 발이 자연스레 거기로 갔다. 정신 차리자, 류건우. 손에 든 노트로 머리를 가볍게 쳤다. 근데 사람이 다 그렇듯 애써 머리에서 이세진 이름 세 글자를 지우려니 오히려 말갛게 웃는 얼굴까지 떠올랐다. 제발... 내 머릿속에서 나가라, 이세진...
...
아니
씨발
근데
솔직히...
나는 너도 같은 마음이라고 확신했는데 말이다... 억울한 마음이 불쑥 튀어 나왔다. 다시 노트로 대가리를 쳤다. 이미 제대로 차였는데 구질하게 굴지 말고 하던 공부나 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머리에 힘주고 3학년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아까 오지랖 부리던 그 새끼 낯짝이 보였다. 실실 웃는 그 얼굴 보니까 또 짜증이 찔끔 올라왔다. 쟤나 나나 이세진한텐 그냥 좀 친한 아는 형이겠지. 내가 썩 괜찮은 놈이라곤 말 못하지만 그래도... 하. 이세진 보고 사람 좀 가려 사귀라고 말해둘 걸 그랬다. 류건우 인생 첫 고백 겸 첫 실연 후 일주일 차. 머리가 복잡해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판이다.
2
“세진아.”
“넹?” / “왜?”
사운드가 겹쳤다. 책을 정리하던 손 네 개가 멈추고 눈이 마주쳤다.
“아, 미안. 배세진 말한 거야.”
“아~ 선배님도 세진이시구나. 저는 이세진이라고 해용~ ”
“어.,, 알아.”
반응이 뭐 저래. 이세진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하하 웃었다.
“세진아, 건우 형이 야자 끝나고 기다리래.”
“그래..? 전해줘서 고마워, 류청우.”
건우 형? 익숙한 이름이 이세진 귀에 쏙 박혔다. 둘 다 건우 형 알고 있나? 친한가? 자발적 아싸 류건우 형이랑 친한 거면 흥미가 돋았다. 말문 막 트려는데 류청우가 말했다.
“슬슬 점심시간 끝나 가는데, 반으로 돌아가자.”
“그래.”
“아, 넹!”
그저 도서부라는 이유만으로 점심시간에 끌려온 장정 몇 명이 책 싹 다 빼서 쓸고 닦는 도서관 대청소를 중단하고 손을 닦았다. 2학기에 동아리 바꿔 도서부 들어온 이세진은 건너건너 알던 류청우 형 빼고 도서부원 누구 있는지도 몰랐다. 이래저래 행사가 겹치는 탓에 동아리 활동을 못했는데, 도서부 사람들 만나는 첫 활동이 도서관 대청소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우, 죽겠다. 쌤들 너무하신 거 아녜요? 저희를 이렇게 막 부려먹고~”
“그러니까...! 이런 중노동은 학교 예산 배분해서 외부 용역 쓰는 게 맞아!”
이세진 찡찡거리는 소리에 격하게 반응한 건 배세진이었다. 뭐야, 저 형님 아까 내 말엔 그렇게 떨떠름하게 대답했으면서... 건우 형보다 싸가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닌가. 이세진이 혼자만의 평가를 수정했다.
“근데 저 선배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건우 형이랑 친하세요?”
학교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며 씩씩거리던 배세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이세진을 홱 뒤돌아 봤다.
“그건 왜?”
“제가 건우 형 좋... 형이랑 친한 사람을 잘 못 봐서 신기해서요~”
이세진이 급하게 말을 바꿨다. 제가 건우 형 좋아해서요~ 습관적인 말이다. 목적어가 건우 형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다. 그냥 이세진은 원래 사랑이 넘쳤다. 같이 학원 다니는 차유진이 새로 산 옷 입고 오면 우리 유진이 형한테 잘 보이려고 예쁜 거 입고 왔구나! 했고, 차유진 옆에 맨날 붙어 다니는 김래빈이 생일 챙겨주면 래빈아ㅠㅠ 래빈이가 형 생일 기억해줘서 너무 설레ㅠㅠ 했다. 가볍냐고 물으면 그런 편이긴 하다만 이세진도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 여자한테는 절대 안 한다. 남자한테만, 남자니까 했다. 이세진은 그냥, 원래 그랬다.
이세진은 평소처럼 했는데, 거기에 류건우라는 게이가 낚여버렸다. 이세진은 상상도 못한 일이라 얼떨떨했다. 이세진은 게이가 뭔지는 알았지만 그러니까, 게이라는 개념을 안 거지 당장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그도 그럴게 이세진이랑 놀던 놈들은 게이라는 말을 욕으로 쓰면 썼지, 아무도 자기가 게이라고 커밍순? 아니 뭐였지, 아 커밍아웃! 그거 안 했다. 미국 영화 보면 꼭 한 번씩 크롭 티 입고 윙크하는 게이가 등장했는데 아무래도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 솔직히 류건우 형이 게이라고 했을 때도 류건우 이미지는 이세진 머릿속 게이가 아니라서 장난치는 줄 알았다.
“너 건우 형 좋아해?”
배세진이 끄는 말없이 불쑥 물었다. 이세진이 왜 필사적으로 말을 바꿨는데. 배세진은 진짜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세진을 올려다봤다. 이세진은 아니라고 말했다가 저 이상한 형님한테 말꼬리 잡혀서 류건우 형 강제 커밍순 시키는 미래가 그려졌다. 내가 아무리 이런 거 잘 몰라도 그건 아니지. 그냥 묻어버리자.
“와, 지금 이럴 때가 아니네요~ 곧 종 치겠어요~”
“아니, 기어가도 충분...”
“빨리빨리, 저 화장실도 가야해요~”
“...”
배세진이 알고 싶지 않은 걸 들어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3
[멋진 동생 세진이: 거누거누 형~]
[멋진 동생 세진이: 오늘 석식 노맛이던데]
[멋진 동생 세진이: 매점ㅇㄸㅇ?]
류건우는 폰 화면에 뜨는 알림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얜 나랑 뭘 하고 싶은 거지? 이세진은 고백을 거절하고도 계속 연락을 해댔다. 일방적으로 안읽씹 하고 있긴 한데, 정말 꾸준히도 연락이 왔다. 이세진 개인 톡방 빨간 동그라미 속 41이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최소한 마음 정리할 시간은 줘야하지 않냐. 아무래도 멋진 동생 세진이라는 저장명 부터 바꿔야 했다. 저거 볼 때마다 이세진이 뭐냐며 옆에 딱 달라붙어 굳이 귓속말로 이렇게 저장해달라고 했던 이세진이 떠올랐다.
아, 씨발. 이름 변경 누르려다 실수로 카톡을 읽어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대화 창을 위로 올려 앞선 대화 내용을 조금 읽었다. 진짜 구질구질한 전남친 같은 꼴인 거 류건우도 알고 있다. 동그란 말투를 가진 이세진 톡 몇 개 보다가 류건우는 이세진을 차단했다. 마음 정리 좀 하자고, 이 새끼야.
4
이세진은 류건우가 고백한 이후 네이버에 게이 쳐서 다섯 시간 동안 여기저기 타고 들어가서 글을 읽었다. 뭔가 많이 알아봤고, 류건우가 게이인 거 실수로라도 발설 안 하려고 배세진 형님 앞에서 긴장하고 있다. 어장 관리로 보일까봐 평소에 다른 친구들에게 하는 사랑 듬뿍 말투도 류건우에게는 사용 안 하기로 결심했다. 연애 상대로 안 보이는 것뿐이지 건우 형은 이세진이 아주 좋아하는 사람 분류에 속해있으니까.
근데 알아보고 결심을 하면 뭐 해, 이세진은 류건우 때문에 여러 가지 신경 많이 쓰고 있는데 정작 이세진은 그날 이후 류건우를 본 적이 없었다. 몇 번이나 반에 찾아갔지만 갈 때마다 어디에 있는 건지 건우 형 분신 같던 안경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았다. 고백 거절하고 완전히 똑같은 사이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건 심했다. 모닝콜 없어진 건 좀 허전하지만 그렇다 쳐, 이세진이 보낸 카톡 일주일 동안 전혀 안 읽고 있는 건 너무하지 않나? 류건우는 의도적으로 이세진을 피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귀지 않는다고 이렇게 쉽게 멀어질 사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책상에 오른쪽 뺨 대고 엎드려서 건우 형과의 카톡 방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없어지지 않고 있던 1 표시들이 사라졌다. 류건우가 이세진 톡 읽은 거다. 매점 같이 가주려나? 기대하고 있는데 답장이 없었다. 진짜로. 10분 지나도 답장이 안 왔다. 카톡 몇 개 날리니 다시 지긋지긋한 1이 떴다. 이 형이 진짜... 하... 이세진이 고개를 책상에 처박고 눈을 감았다. 나 좋아한다면서 형은 나 이렇게 오래 안 봐도 멀쩡한가? 개 쓰레기 같은 생각을 했다가 반성했다. 마음 정리 할 시간이 필요한가 보지. 차가운 무표정이 기본인 남자인 주제에 애교 좀 떨면 바람 빠지는 소리 내며 피식 웃는 류건우 형이 좀 그리웠다.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던 이세진은 건우 형과의 카톡방을 들어갔다. 첫 카톡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대화 내역을 읽었다. 첫 카톡부터 날짜가 지날수록 작았던 왼쪽 말풍선이 커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오른쪽에서만 잔뜩 쓰이던 물음표가 점점 왼쪽에서도 쓰였다. 이세진 노력의 결과였다. 괜스레 뿌듯해졌다. 아무리 봐도 우리 친하다고. 건우 형이 나 연애 상대로 좋아하는 거 빼도 나 귀여운 동생으로 많이 좋아하고 있는게 분명하다니까. 아, 이 날도 석식 맛없었나보다. 오늘 씹힌 카톡이랑 비교돼서 다시 침울해졌다.

5
류건우가 제 반 나와 계단 올라서 3층 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교실이 이세진 반이었다. 앞문에서 제일 가까운 자리가 이세진 자리여서, 류건우가 앞문으로 머리만 내밀고 이세진 부르면 이세진은 앞에 선 사람 제대로 보기도 전에 류건우 이름부터 뱉었다. 엎드려 자다가 덜 뜬 눈으로 건우 형? 할 때도 있었고, 친구들에 둘러 쌓여 웃다가 건우 형! 할 때도 있었다. 종종 공부하고 있다가 건우 형 잠시만요 하고 십 초 쯤 지난 뒤 한 손으로 스톱워치 멈추면서 고개를 들 때도 있었다. 이세진이 류건우를 볼 때면 늘 동그란 눈이 반으로 접히고 볼이 동그랗게 올라왔다. 세진이 보고 싶어서 왔어용? 말투마저도 동그란 게 귀여워 류건우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샜다. 너 그거 풀던 거, 마저 풀어. 에이~ 십분 밖에 없는 쉬는 시간에 형이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래요~
귀엽게 구는 이세진 보면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웃을 일 있으면 이세진이 생각났다. 그래서 류건우답지 않은 짓을 많이 했다. 류건우 답지 않은 짓이 뭐냐고 하면 비효율적인 행동들. 그 짧은 쉬는 시간에 계단 올라 앞문 열고 빼꼼. 그리고 이세진, 잠깐 나와 볼래? 하면 이세진이 순순히 끄덕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왜요? 류건우보다 조금 더 큰 놈이 고개를 살짝 숙여 눈높이를 맞춰줬다. 그러면 류건우보다 조금 더 어린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초롱초롱한 눈이 뭔가 기대한 거 같았다. 그 표정 보고 류건우는 이게 아닌데? 생각했다. 진짜 별 거 아닌 거였거든... 기대했으면 미안하다. 머쓱한 말과 함께 하리보 한 봉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이세진에게 건넸다. 덩그러니 손을 내밀고 있자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이세진이 류건우 손바닥에 구겨진 작은 하리보 봉지를 봤다가 고개를 들어 류건우 얼굴을 봤다.
“어... 형, 이거 주러 왔어요?”
“어, 쌤이 주셨는데 난 안 먹어서.”
류건우가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잔반 처리 같은 게 아니었다. 과제 내러 갔다가 수학 쌤 자리에 쌓여있던 하리보 보고 굳이 하나 달라고 한 거였다. 괜한 짓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이세진이 쪼그마한 하리보 봉지를 소중한 것 대하듯 두 손으로 받았다. 이세진 앙 다문 입꼬리와 동그란 볼이 삐죽삐죽 올라가고 있었다. 감사합니당... 세진이 감동~
잘했다, 보고싶다, 그런 말들과 하리보 한 봉지만 줘도 이세진은 좋아하는 티를 많이 냈다. 계속 사랑 해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뭘 감동이야. 오버 하지 말고.”
“흠~... 오버는 형님이 이거 들고 저한테 온 거고요~”
너 춤추는 곰돌이잖아. 생각나서. 아 ㅋㅋ 진짜 웃겨. 건우건우 형~ 하리보 보고 세진이 생각한 거예요~? 이렇게 작은 곰 보고 제 생각한 사람은 또 처음 보네~
이세진 얼굴 한 번 보고, 이세진이랑 말 한 번 더 섞고, 이세진 웃음소리 들으려고 귀찮은 짓을 기꺼이 했다. 류건우 답지 않게.
6
이세진은 카톡 내역 보고 침울해져서 책상에 한참 엎드려 있다가 잊고 있던 거라도 생각난 것처럼 벌떡, 지갑 챙겨서 일어났다. 밥 안 먹으면 제 손해라는 걸 깨달아서 그랬다. 내가 건우 형 없다고 매점 못 가는 바보도 아니고. 이미 이세진 친구들은 지들끼리 매점 가서 컵라면에 핫바 흡입하고 있을 터였다. 거기 꼽끼던가 혼자 먹던가. 아무튼 밥은 챙겨야지. 그래야 야자를 버틸 수 있다. 터덜터덜 매점 갔더니 사람이 엄청 많았다. 오늘 석식 메뉴가 해괴해서 그랬다. 줄 서서 컵라면 물 받기엔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전자렌지도 필요 없는 빵 두 개 샀다.
빵 포장 비닐 버리고 고개를 드니 운동장 반대편에 건우 형이 보였다. 마음 정리할 시간 주자고 몇 분 전에 생각했던 거 다 까먹어 버리고. 이세진이 특유의 그 쾌활한 목소리로 류건우를 부른 건 관성적이었다. 그러자 류건우가 뒤돌아 이세진을 봤다...가... 다시 고개를 홱 돌리고 걸어갔다. 이세진이 저도 모르게 류건우 이름 부르고 아차 한 거랑 별개로, 얼굴 보면서 개무시 당하니까 기분 안 좋았다. 이세진이 코를 훌쩍였다. 오해 하지 마라. 눈물은 안 났다.
7
“왔냐?”
“응. 근데... 류청우 너도 있는 거였어?”
“하하, 응. 난 형이랑 집에 같이 가니까.”
류청우 말에 배세진이 아, 맞네 작게 혼잣말을 흘렸다. 멍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배세진 보면서 류건우가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너희 어머니 가게 알바 아직도 할 수 있나 해서.”
“...! 하게? 당장 연락드릴게.”
배세진이 눈썹이 죽 올라갔다. 폰을 꺼내 문자를 보내며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분명 학업에 집중하고 싶다고, 장학금 받으려면 성적... 아.”
멀티 플레이하며 말하던 배세진 손가락이 멈췄다. 배세진 난처한 표정에 류건우가 뒷목을 쓸며 말했다.
“어, 그거 맞다. 티원 장학 재단 장학금 예산이 올해 많이 줄었더라. 못 받게 됐어.”
“그래? 그, 우리 엄마는 알바 분명 좋다고 하실 거야!”
예전에 형이 잠깐 도와주고 간 이후로 형 찾는 손님들이 많다고, 엄마가 형 아직도 알바 할 생각 없냐고 많이 물어보셨거든! 아, 이것 봐. 엄마 답장 왔다. 당장 내일이라도 출근해주면 좋대!
“고맙다, 세진아. 그럼 내일 가게로 찾아뵐게. 어머님 번호 좀 보내주라.”
“어, 그래...!”
“형, 무리하지는 마. 엄마도 건우 형 한 명 대학 보낼 능력 된다고 하셨으니까.”
“나만 대학 보내면 되냐? 너도 있는데.”
“형, 나는 곧 메달 딸 거라서 괜찮아~ ”
류청우 말에 류건우가 웃음을 보였다.
8
“야, 이세진!”
“깜짝이야, 왜요?”
“가운데에 붙여야지!”
배세진이 이세진이 들고 있는 책을 가리켰다. ‘청솔 고등학교’ 도서관 적힌 종이 스티커가 척 봐도 삐뚜룸하게 붙여져 있었다.
“죄송해요~ 근데 학교 책인 것만 알면 됐죠~ 돈 주는 것도 아닌데 대충 해요, 형님도.”
이세진 말에 배세진은 그건 그렇지... 돈 주는 것도 아닌데... 했다. 이 미친 학교는 도서부원을 무슨 자원봉사자로 알았다. 토요일에 자습 나온 도서부원을 서프라이즈로 부르더니, 새 책에 이걸 붙이랬다. 참고로 책은 백 권 정도다. 토요일에 나온 사람이 배세진이랑 이세진 밖에 없어서 둘이서 이걸 붙이고 앉아있었다.
“다 했다!”
“저도요...”
스티커 붙이고 책장에 분류해 정리까지 한 두 세진이는 완전히 녹초가 돼 의자에 늘어졌다.
“배고파요...”
“나도...”
“갈비찜 먹고 싶다...”
“나는 뜨끈한...”
“뜨끈한 뭐요?”
“...이세진 너 우리 집 올래?”
“넹? 오늘이요?”
“어, 우리 엄마가 오늘 소갈비찜 하셨다는데, 많다고 누구 좀 데려오라는데.”
“오~ 좋죠~”
“건우 형이랑 청우도 온대.”
익숙한 이름에 이세진이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말했다.
“갈래요.”
류건우 형이 보고 싶어서.
대충 정리하고 학교 정문 나선 이후론 이세진은 배세진 가는대로 졸졸 따라가기만 했다. 야, 커다란 애가 뒤에 있으니까 신경 쓰여. 앞으로 와. 그게 무슨, 아, 뭐, 네... 버스타고 한참 가서 이세진은 배세진 집에 입성했다.
“어머, 네가 세진이니? 완전 큰세진이네~”
“이세진이라고 합니다. 헉, 배세진 형님 잘생긴 게 어머님 닮은 거였네요~”
이세진이 배세진 모친과 능글맞은 대화를 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세진?”
류건우였다. 류건우가 당혹스러움이 서린 무표정으로 이세진을 쳐다봤다. 아, 좋다. 이세진은 류건우 딱딱한 표정에서 감정 읽는 걸 좋아했다. 여기 류건우 형 말고도 사람 많아서 기분 좋은 거 숨길 필요가 없었다. 이세진이 씩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인사했다.
“건우건우 형님도 여기 계셨어요? 몰랐네~”
“야, 내가 아까 건우 형 있다고...읍.”
“저희 너무 오랜만이죠. 잘 지냈어용?”
“어, 잘 지냈지.”
“아, 잘 지내셨구나. 하하... 그럼 저희 빨리 식사 하러 갈까요?”
이세진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물론 어머님 요리 솜씨가 대박인데요? 하고 너스레를 떨긴 했다. 아무튼 류건우가 저보다 더 안 괜찮은 표정이라 이세진은 묘하게 승리감이 들었다. 밥을 먹고 나니 류건우가 제일 먼저 나서 설거지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류청우, 배세진, 이세진까지 나서서 제가 하겠다고 했다. 배세진 모친이 아무도 설거지하지 말라고 하자 이세진이 어머님 말씀 씹고 가위바위보 이긴 두 명이 하자고 했다. 콜 했고, 류청우와 배세진이 설거지에 당첨됐다. 배세진 모친이 전화 받으러 가고 류건우와 이세진만 할 일 없이 남겨졌다.
“너넨 티비나 보고 있어!”
“넹.”
류건우가 소파에 앉았고, 이세진은 그 옆에 앉았다. 오랜만에 가까이서 보는 류건우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다. 남의 속도 모르고. 연락 죄다 끊어버리고 사람 피해놓고. 짜증나게. 이세진이 류건우 쪽으로 바짝 붙었다.
“형.”
“...”
“건우 형.”
이세진이 짜증 섞인 소리를 냈고 류건우는 그제야 이세진을 돌아봤다. 류건우는 화난 표정도, 무표정도 아니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울어?”
“안 울어!”
운다니, 진짜 개소리다. 눈 약간 촉촉해진 것 뿐이지 안 울었다. 이세진은 화 날 때 눈물부터 나는 타입 아니다. 류건우가 이세진 손잡고 나가서 얘기 하자고 했다. 이세진은 순순히 일어났다. 류건우 손이 따뜻했다.
엘리베이터 타자마자 손이 떨어졌다. 이세진이 제 후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누가 들을까봐 아예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 아홉 시가 다 된 가을 밤이라 어둑어둑했다. 이세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류건우 얼굴만 빤히 보며 가만히 있었다. 그러면 류건우는 시선을 피했다. 류건우가 이세진 어깨 보면서 먼저 말문을 텄다.
“할 말 있냐?”
“우리 친한 형 동생은 해도 되잖아요. 근데 왜...”
나 피하고, 무시하고. 다시 안 볼 것처럼... 이세진 볼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이세진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류건우가 고저 없이 말했다.
“...세진아.”
“네.”
“너 나 좋아하냐?”
“...”
“네가 나 안 좋아한다며. 네가 거절했잖아.”
아니야? 류건우 목소리 끝이 떨렸다. 이세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욕심이 많네? 나는 나 안 좋아한다는 사람한테 예전처럼 그렇게 행동 못 한다. 전엔 내가 착각한 거야. 우리가 같은 마음인 줄 알고.”
이세진은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자한테 받은 고백이니까 이것도 고백으로 카운트 해야하나, 같은 속편한 생각만 하고 있던 이세진은.
“친구 좋지. 근데 나는 친한 형 동생 사이에서 너한테 했던 것처럼 안 해. 울지 마. 나 못 달래준다.”
류건우가 쐐기를 박았다. 이세진은 웃기게도 류건우가 저와 선 긋는 말에 류건우가 자길 좋아했던 무게를 알았다. 싸늘한 말 뱉은 건 류건우인데, 류건우는 저 말 하면서 상처 받았을 거다. 류건우가 먼저 들어가고 남겨진 이세진 머리 위를 비추던 가로등이 깜빡거리다 곧 꺼졌다.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야 이세진이 숨을 힘겹게 뱉어냈다.
윽...
이세진이 어둠 속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배세진에게 카톡을 넣었다. 형, 죄송해요. 저 먼저 갈게요. 집 들어가서도 가족들한테 나 울었다고 광고할 수는 없어서, 눈가를 비비지도 않고 바닥으로 물을 뚝뚝 흘렸다. 눈물 멈추면 집 가려고 했는데 눈물이 계속 나왔다. 결국 몸에 힘이 빠져서 그냥 로비에 쭈그려 앉았다.
“야, 너 뭐해?”
배세진이었다. 이세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남한테 우는 거 보여주기 싫었다. 이 형님은 갑자기 왜 나와선. 아무 말 없이 훌쩍이기만 하자 배세진이 옆에 와 앉더니, 한참을 머뭇거리다 툭, 말했다.
“너 건우 형 안 좋아한다며.”
“안 좋아해요.”
“그럼 왜 울어? 싸웠어?”
이세진은 생략된 말에서 배세진이 류건우와 저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음을 눈치 챘다. 속상하고, 묻는 사람도 있고. 이세진은 오랜만에 솔직해졌다.
“건우 형 고백 거절했는데 계속 보고 싶어요. 근데 그게 형한테 상처 주는 거니까 미안해서요.”
이세진이 힘없이 웃었다. 멋대로 류건우 형을 우정 카테고리에 넣었다. 건우 형이 고백하고 나서도 그랬다. 내가 잘못한 거 맞는데, 류건우 형 끊어내기 싫었다. 그런 스스로에 화났다. 나는 왜 이렇게나 감정소모 하고 있지. 속이 울렁거렸다.
그때 배세진이 이세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세진, 너 진짜 건우 형 안 좋아해?”
이세진이 제 오른 손을 내려다 봤다. 아까 류건우가 잡은 손이었다. 손에 남아 있는 감각이 류건우 형을 처음 만난 순간의 그것이었다. 주먹을 세게 쥐었다 폈다.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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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건우는 집에 오자마자 벽에 대가리를 박았다. 이세진 울던 얼굴이 아른거렸다. 이세진이 자꾸 마음을 후볐다. 저를 좋아하는 듯, 아닌 듯 애매하게 구는 이세진. 이미 고백했다 까였는데 무슨 기대를 하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이미 까였는데 속도 없이 친한 형으로 남기엔 류건우 자존심이 용납 못했다. 그래서 고백한 게 후회됐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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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진은 친구가 많다. 키 크고 잘생긴 거야 눈 달렸음 다 알 거고, 눈치 빠르고 늘 서글서글하게 구는 성격은 호감을 사면 샀지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딱 한 명, 아니 여섯 명만 빼고. 성격 좋아서 사귀었는데 막상 여친 입장에선 아무한테나 다 웃어주고 다녀서 개 빡쳐요. 이세진이 여친한테 차일 때마다 들은 말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활발하게 연애 사업 펼쳐온 이세진은 고등학교 들어와서도 꾸준히 이어가다 벚꽃 흐드러지게 피는 4월에 차였다. 올해 꽃구경은 친구랑 가야겠네... 이세진은 진짜 슬펐는데 아무도 이세진을 위로해주진 않았다. 저 새끼 어차피 한 달도 안 가서 여친 생겨. 친구 농사 흉작이다ㅠㅠ 세진이 슬퍼용.
암튼 건장한 K-남고딩이라면 이별의 아픔은 역시 운동으로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체육대회가 코앞이라, 이세진은 계주 나갈 사람 있냐는 반장 말에 손 번쩍 들었다. 반에서 손꼽히는 길쭉한 친구들과 함께 별 무리 없이 4인 계주로 뽑혔다. 길쭉한 다리로 폴짝폴짝 뛰면 1등이었다. 아현아현, 네가 첫 번째 할래? 으, 응? 나보단 세진이가, 낫지 않을까? 음~ 사실 순서는 별 상관없지? 뭐래, 이세진 미쳤냐? 존나 상관있지. 첫 주자는 그물 지나야하고 두 번째는 주사위 굴려서 나온 수 만큼 제기차기. 세 번째는 림보, 네 번째는 쪽지에 적힌 사람 찾아서 같이 뛰어야 됨. 엥, 그냥 달리는 거 아니었어? 모르고 손들었냐, 븅시나. 얘, 얘들아, 욕하지 말자. 미친 나 일단 제기는 안 됨. 림보는 아현이가 잘 하지 않을까? 으, 응. 나도 그건 자신 있어. 그럼 됐고, 여기서 제기 가능한 사람 나 밖에 없냐? 어어, 일단 네가 제기로 가고, 사람 찾는 건 이세진으로 가자. 오케이~ 그럼 난 자동으로 그물? 오히려 좋아. 야, 첫 주자가 제일 중요하다 못 하면 뒤진다. 알겠으니까 니나 잘해. 이렇게 그물 한 손으로 잡고 쑥 지나가야 됨. 알겠으니까 입 좀 다물라고.
계주 연습한다고 좀 많이 달렸다. 역시 몸을 움직이니 스트레스가 다 날아갔다. 이제 이세진은 전여친이고 뭐고 깔끔하게 잊었다! 그리고 체육 대회 날은 빠르게 찾아 왔다. 이세진 반은 다른 종목에서도 꽤 점수가 높아서 계주 1등하면 전체 1등이었다. 어우, 부담 돼. 이세진이 하나도 부담 없는 것 같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지랄하지 말라고 했는데 선아현만 세진아, 부담, 갖지 말고... 열심히 하자...! 해줬다. 이세진 지금 부담 가득인 거 알아채주는 친구 몇 없다. 역시 아현아현이 최고~ 아냐, 세,세진이도 최고...!
이세진은 몸 잘 풀고 트랙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대기하다가 선아현이 출발하고 나서야 자리를 잡았다. 같은 반 선아현이 건네준 바톤을 이세진이 건네받았다. 4월 치고 유독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이세진이 달렸다. 가장 먼저 바톤을 건네받은 이세진은 무난히 트랙 가운데 쪽지 더미에 처음으로 도착했다. 아무거나 하나를 뽑았고, 안경 낀 사람 데리고 오라기에 가장 가까이 있는 3학년 몇 반에서 안경 낀 사람을 찾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선배에게 같이 가 달라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선배는 이세진 손 안 잡고 일어났다. 급한데 학생들 무리에서 빠져 나오는 데에 시간 걸릴 것 같아서 이세진이 냅다 손잡고 끌어냈다. 손잡은 채 그대로 달렸다. 무난히 1등으로 들어왔고, 손을 꽉 잡고 있는 선배를 봤다. 숨을 거칠게 내쉬는 선배는 햇빛 아래에서 보니 꽤 잘생겼다. 안경이 퍽 잘 어울리는 하얗고 서늘한 미남? 분위기 있네... 솔직히 뚫어져라 볼 수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손 좀."
조각상이라도 감상하듯 선배 얼굴에 홀려있던 이세진은 짧은 음성에 깜짝 놀라 네, 네! 하고 선배 손 잡았던 오른손을 놓았다. 놓은 손을 허벅지 옆으로 내리고 괜히 주먹을 쥐었다. 주먹 쥔 손바닥이 축축했다. 선배가 이세진에게 고개 까딱하고 돌아가려는데 이세진이 선배 손목을 붙잡었다. 친해지고 싶어서. 선배 이름이 뭐예요? 류건우. 저는 이세진이요.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그러던가. 류건우의 떨떠름한 표정 다 캐치한 이세진은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그 특유의 미친 친화력으로 번호까지 따냈다.
몇 번인가 연락 했다. 류건우 형 좀 어렵다. 내가 귀찮나? 애교 떨며 형형 거리면 금세 우리 세진이~ 하는 형들만 봤는데, 건우 형은 뭐 애교 떨 틈도 안 줬다. 띠리리리리링!!!! 아잇, 깜짝이야. 마스크팩 뗄 시간이다. 거울 보며 얼굴 찹찹 두드리고 있을 때 휴대폰 알림이 떴다. 카톡 미리보기가 아주 잘 보였다.
[건우 형: 너 생각해서 말하는 건데]
[건우 형: 나랑 친해져서 좋을 거 없어]
류건우가 대놓고 벽 쳤다. 이세진은 황당했고, 기분 상해서 답장 안 했다. 그랬던 이세진이 류건우 다시 본 건 두 번에 걸쳐서 였다.
첫 번째. 카페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 봤을 때.
여기 토요일마다 여섯 시에 공연한다? 이세진은 친구 말에 폰을 두드려 시간을 확인했다. 다섯 시 삼십 분. 오~ 얼마 안 남았네? 누가 공연하는데? 몰라. 매번 다르대. 그럼 공연 보고 저녁 먹으러 가면 되겠다. 그러게, 저녁 뭐 먹을까? 오, 세팅한다. 밴드 오나 봐. 드럼, 베이스, 일렉, 키보드. 그리고 잠시 뒤 류건우가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섰다. 여섯 시가 되자 공연이 시작 되었다.
류건우는 이세진이 아는 웬만한 가수만큼 잘 불렀다. 원래 목소리도 좋았는데 노래 부를 때도 좋았다. 군더더기 없이 맑은 음색으로 시원하게 고음을 내질렀다. 류건우 본 적 몇 번 없지만, 볼 때마다 늘 표정 변화가 없었는데 노래 부르는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마주쳤을 때, 류건우가 즐거워 보였던 건 기분 탓으로 치부하는 게 맞았다. 생각은 그렇게 해도 이세진 눈은 류건우를 쫓고 있었다. 친해져서 좋을 거 없다느니 딱딱한 말에 껄끄러웠는데, 노래 부르는 모습이 사람 같았다. 그날 저녁에 이세진은 류건우한테 톡 보냈다. 저는 친해지고 싶은데용 ㅎㅎ
두 번째. 토론하는 모습 봤을 때.
이세진 가는 곳마다 류건우가 눈에 밟혔다. 예전에도 같은 학교였는데 지나다니면서 왜 이 얼굴을 몰랐지? 심지어는 학교 토론 대회 결승 팀이 건우 형 팀이라는 걸 난 왜 몰랐지? 3학년 결승전이라고 참가한 모든 학생들이 구경하게 해 줬는데, 류건우 형은 애초에 자료 조사를 잘 해왔으니 자신감이 엄청났다. 상대편이 근거로 들고 나온 논문은 이미 조작으로 밝혀져 연구자가 지원금을 모두 물어낸 연구이므로 신뢰성이 없다고 지적할 때는 어이가 없었다. 말빨 좋은 것도 맞긴 한데, 정보 차이로 이득 보는 부류인가. 자신감에 근거가 있다는 게 멋있었다. 친해져서 좋을 게 없긴 뭐가 없냐. 친해지면 무조건 좋을 사람인데. 류건우 형 싸가지 없는 것도 좀 멋있어 보였다.
11
“동경일까?”
이세진이 턱을 괸 채로 신뢰하는 친구에게 물었다. 선아현이 진지하게 말을 골랐다.
"그, 글쎄. 세, 세진이 마음이니까 나는, 잘 모르지만... 앞으로... 어,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생, 생각해 보면 어때...?"
어떻게 하고 싶은지. 이세진이 눈알을 굴리다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아현이 미소 지었다.
“아현아현, 휴대폰 좀 빌려줄래?”
“으응, 여기.”
이세진이 선아현 휴대폰으로 이미 외워버린 번호를 눌러 메시지를 보내고 일어섰다.
[형 저 할 말 있어요. 피하지 마요~]
“세, 세진아. 점심시간, 15분... 남았어...!”
“응, 빨리 갔다 올게~”
이세진이 류건우 반으로 향했다. 좀 친해지고 나선 류건우가 이세진 반 찾아왔던 터라, 이세진은 류건우 반 가는 길이 생소했다. 형 자리가 어디더라. 생각하며 가는데 류건우가 교실 앞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류건우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잠 잘 못 잤나.
“왜 왔어.”
날카로운 말에 이세진이 웃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저 형을 못 보니까 너무 힘들어요~ 근데 이게 사랑인지는 모르겠어요.”
“...네 마음인데 네가 모르면 누가 아냐.”
“다시 못 볼까봐 무서운 기분이 사랑이에요?”
류건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세진 마음이 제 생각보다 무거웠다.
“...글쎄. 연애 감정이 아니어도 그런 기분은 들 수 있지.”
류건우가 입술을 꾹 물었다가 떼고 대답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그게 사랑이라고 말한다고 이세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저 형 사랑하나 봐요, 말할 리가 없으니까. 만에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런 게 아니라... 확신이 필요했다. 이세진이 스스로 내린 판단 아래 나를 좋아한다고 말 해주면 좋겠다고. 계속 그렇게 생각했다.
“동경일까요?”
“나한테 묻는 거냐.”
“네. 형은 어떻게 확신해요?”
옅은 갈색 눈동자가 류건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동그란 눈매의 말간 얼굴. 사랑해주고 싶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이세진. 확신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류건우랑 이세진은 달랐다. 사랑하는 거 많은 이세진은 류건우가 없어도 어떻게든 괜찮게 살 거고, 류건우는 이세진 없으면 많이 힘들거다. 사랑의 크기 차이는 몰라도 대체재의 유무는 확실히... 생각을 멈추고 류건우가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자존심을 버렸다.
“...가볍게 생각해. 일단 만나볼래?”
같은 마음이 아니더라도 우선은 잡기.
“가볍게 생각했다가 나중에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 하면요.”
“상처 받지. 근데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거야.”
“제가 안 괜찮다고 하면요? 졸업할 때까지 저 피해 다니다가, 졸업 후에 안 볼 거예요?”
“어.”
대답이 바로 나왔다. 이세진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속상한 얼굴을 하고,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든지 저런 표정을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거 알고 있냐. 내가 너한테 고백했을 때, 나는 네가 받아줄 거라고 확신했어.”
류건우 진짜, 입 터는 거 하난 잘한다. 사랑을 설득하고 앉아있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고. 너 스스로 모르겠으면 날 믿어. 사랑이란 거 별 거 없어. 내가 사랑이라고 느끼면 사랑인거야.”
“...”
“...”
“...”
정적만 지속되다가 점심시간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끝이었다.
“...미안, 내가 괜한 걸 기대했다. 잘 지내라.”
류건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이세진이 류건우 손목을 잡았다. 고개를 푹 숙인 이세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건우 형. 저랑 사귀어요.”
“...괜찮겠냐?”
“저는 역시... 형 못 보는 게 제일 안 괜찮은 듯.”
웃으며 하는 이세진 말에 류건우는 웃음이 나왔다. 누구도 확신 없는 연애가 시작되었다.
fin.